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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물

건국대학교 건대 건너편에 있는 복합건물로 롯데시티몰,롯데시네마,롯데백화점등으로 이루어져있다. 건대에 있는 일감호로 중앙에 와우도란 작은 섬이 있다. 상허기념관과 박물관 일감호 홍예교 1946년 독립운동가인 유석창이 종로구에 설립한 조선정치학관으로 발족하였다. 교훈은 성·신·의이다. 1948년 재단법인 조선정치학원을 설립하여 조선정치대학관으로 인가받았으며, 1949년 재단법인 정치대학원과 정치대학으로 개편하였다. 1959년 재단법인(현재의 학교법인) 건국대학원으로 개편하여 종합대학으로 승격하고 교명을 건국대학교로 변경하였다. 1980년 충주에 충주대학(분교) 설립을 인가받았고, 1990년 의과대학 부속병원을 개원하였다. 2011년 5월 충주캠퍼스의 교명을 글로컬캠퍼스(GlocalCampus)로 변경하였다. 더보기
강화 고인돌 1966년에 하점면 부근리 743의 4번지 점골 고인돌무덤에서 북쪽으로 약 70m 지점에서 청동기시대 집자리가 발굴되었다.당시 동쪽 한 벽면의 길이가 2.5m, 남쪽 벽면이 1.6m 정도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반수혈식(半竪穴式) 벽면은 대부분 무너지고 동면만 15cm 높이로 남아 있어 형태만 짐작할 뿐 전체적인 윤곽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주위의 벽면 아래에서 일렬로 작은 기둥을 세웠던 기둥 구멍[주공(柱孔)]이 발견되었고, 이 집자리의 주거면 가운데에서 짧은 빗금무늬[단사선문(短斜線紋)]가 있는 이중구연(二重口緣)과 각형토기(角形土器)의 바닥 모양을 갖춘 토기 조각도 출토되었다. 더보기
천주교 순교지 절두산 조선시대 한강을 건너던 양화나루터 옆에 있었던 언덕으로 개화기 때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된 곳이다. 한강으로 돌출한 봉우리의 모양이 누에의 머리 같기도 하고, 용의 머리 같기도 한 데서 잠두봉·용두봉·가을두라고도 불렀다. 양화나루터는 서울에서 양천을 지나 강화도로 가는 중요한 길이었으며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또한 전국에서 세곡이 조운선에 실려 올라오는 항구로서 농산물의 유통을 담당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잠두봉은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한강을 거슬러 온 프랑스함대에 대적하기 위해 방어기지로 사용되었다. 이곳이 절두산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병인양요 이후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움과 동시에 1만여 명의 가톨릭(천주교) 신자들을 붙잡아 이곳에서 목을 잘라 처형한 데서 연유한다. 한국.. 더보기
이화여자대학교 1886년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인 M.F.스크랜턴 부인에 의하여 창설, 이듬해 고종황제가 교명을 이화학당이라고 이름하였다. 교훈은 '진, 선, 미'이다. 1910년 4년제 대학과정을 신설하고, 1925년 이화여자전문학교로 개칭하였으나, 1943년 일제의 탄압으로 1년제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자양성과로 격하되었다가 1945년 경성여자전문학교로 다시 개칭하였다. 1945년 10월 이화라는 교명을 되찾고, 한림원·예림원·행림원 등 3원에 문과·의학예과·교육과·약학과·체육과·미술과의 8개 학과를 둔 종합대학으로 승격하여, 초대총장에 김활란이 취임하였다. 더보기
마포구 합정역에 있는 메세나폴리스 합정역과 연결되어있는 주상복합건물로 지하의 쇼핑몰들과 각종 구조물들이 눈길을 끈다. 더보기
전주 전동성당 사적 제288호로 천주교 신자의 순교지이기도 한 이 곳에 1889년 프랑스의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 소속 보드네(한자명 尹沙物) 신부가 성당 부지를 매입하고, 1908년 V.L.프와넬(한자명 朴道行) 신부의 설계로 건물이 완공되었다. 호남지방의 서양식 근대건축물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것의 하나로, 평지의 성당으로는 대구 계산동(桂山洞) 성당과 쌍벽을 이룬다. 화강석을 기단(基壇)으로 사용한 붉은벽돌 건물로서, 본당과 측랑(側廊)의 평면 구성에다 내부는 둥근 천장으로 되어 있다. 중앙의 종탑을 중심으로 양쪽에 배치된 작은 종탑들은 조화로운 입체감을 창출, 건물의 상승감을 더해 준다. 종머리는 로마네스크의 주조(主調)에 비잔틴풍(風)이 가미되어 있어 건물 본체와 잘 어울린다. 1988년 화재로 .. 더보기
동대문 성곽길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는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1396년(태조 5년)에 한양 둘레에 약 18km의 성곽을 쌓는다. 이후 세종때에는 흙으로 된 구간을 모두 돌로 바꾸어 쌓았고 영조때에는 성곽 동쪽 부근에 방어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치성을 쌓았다.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의 능선을 잇는 성곽과 성문은 일제강점기에 훼손 되어 일부만 남았다. 지금 이 성곽을 ‘서울성곽’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일부 구간은 성곽길을 따라 걸을 수 있게 했다. 더보기